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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소방관의 어느 날…

초보소방관의 어느 날…

  • 기자명 편집부
  • 입력 2012.12.07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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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들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라고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 "부모님이요." 라고 대답을 한다. 맞다. 자식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희생하시는 우리 부모님, 부모님들이라는 대답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은 물론이거니와 시민들의 어버이 역할을 하는 소방관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시민을 위해서 봉사 하는 소방관 말이다. 이런 마인드로 내가 소방관이 된지 벌써 6개월이 지났다. 때는 거슬러 9월 23일 야간근무를 하러 출근을 했다.

매일 출근하면서 기도를 하지만 오늘도 제발 무사히 큰 사고 없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출근을 했다. 교대점검 및 장비점검을 하고 저녁식사를 하려고 밥을 한 수저 막 떠서 입에 넣은 상황이었다. 갑자기 어디서 친숙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 거였다.

구조출동이었다. 나는 바로 지령서를 확인했고, 확인하는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기 시작했다. 처음 겪어보는 산악구조 그것도 추락사고이기 때문이었다. 경험이 전혀 없었던 터라 심장이 콩닥콩닥하였고 온갖 두려움이 나를 엄습해왔으며 눈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숙명적 마인드로 당당히 용감하게 맞서기로 했다. 또 선배 소방대원님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믿고 시키는 대로 하면 잘 해내리라 생각했다.

펌프차 1대, 구급차 1대 총 6명이 20여분을 달리다 보니 우리는 어느덧 사연댐 근처 무학산 밑에 도착하였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맞이하고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나이는 30살 중반정도 돼 보였다. 어머니가 벌초하고 내려오시다 산 밑 계곡으로 굴러 떨어지셨다는 거였다.

그 순간 나는 정말 맘이 급해졌다. 심한 부상이고 생명에 지장이 있으면 어쩌지 하고 말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우리는 야간투시랜턴, 제논 탐조등, 분리형 들것, 구급약품등 모든 장비를 갖추고 바로 신고자를 따라 산행에 오르기 시작했다. 산길은 생각보다 가팔랐고 거리도 생각보다 먼 거리였다.

날도 어두워지고 길 폭도 좁고, 갑자기 내 머릿속에는 1초라도 빨리라는 생각과 어느 정도 위험이 인지돼서인지 안전도 중요하니 조심히, 조심히 집중하자라는 생각이 교차했다.  40여분가량 산길을 뛰다시피 걷기를 하여 요구조자가 추락한 지점에 다다르게 되었다.

요구조자는 여기로부터 50m정도 계곡 아래로 추락한 거였다.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해서 요구조자인 어머님을 뵙게 되었다. 머리는 15cm 찢어져서 붕대로 자체지압을 한 상태였고 가슴에 통증을 호소하며, 아버님은 그런 아내를 뒤에서 꼭 껴안고 지탱하고 계셨다. 말 그대로 한 가족이 벌초하고 돌아오다 날벼락을 맞으신 상황이었다. 순간 우리는 응급처치 및 지혈, 부목 등을 대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분리형 들것에 옮겼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난관의 시작이었다. 계곡인지라 물도 흘렀고, 바위도 많았고, 여간 상황이 나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우린 팀장님의 지휘아래 역할분담을 하며 차근차근 한걸음씩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한걸음 한걸음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작전대로 4명이 번갈아 가며 들것을 들고 한명은 앞에서 길잡이 역할, 그리고 나머지 한명은 뒤에서 보조역할을 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산은 우리에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아름답고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산하고는 전혀 달랐다.

길은 폭이 매우 좁아서 네 명이 들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두 명이 겨우 들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선배님들은 후배를 쉬게 하려고 하시고 후배들은 선배님들을 쉬시라고 하면서 서로 배려하고 서로 솔선수범 하려는 거였다.

위, 아래를 떠나 6명 모두가 한명의 소방관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또한, 어떻게 하면 요구조자를 안전하고 신속하게 이송할 것인가에만 모두들 촉각이 곤두서 있었다. 그러면서 진한 전우애 및 동료애 그런 것들을 느낄 수 있었고, 뭔가 찌릿찌릿한 느낌이 날 지배하고 있었다.

이송도중 손에 힘은 점점 떨어지고 길 폭은 너무 좁아서 자칫 실수하면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 정말 아찔한 순간의 연속이어서 빨리 이송완료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일 꾸준히 체력관리를 했는데도 아직 마니 부족한가보다.

선배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이 부족하고 경험도 없던 터라 진행에 장애가 되고 있었다. 내가 막내로서 우리 팀에 보탬이 되어야 하는데 자꾸 방해가 되는 게 아닌 가해서 죄송스러웠다. 그러면서도 팀장님은 조심조심 신속도 중요하지만 자칫 실수하면 다들 밑으로 떨어진다고 계속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주셨다. 우리는 서로 힘이 들면 교대로 번갈아가면서 이송을 계속 해나갔다.

어느 정도 가니 4명이 들어도 될 만한 폭이 드러났다. 거기서부터는 조금 나았다. 넷이 드니 둘이 들 때보다 훨씬 나았다. 이때 내가 소방관이면서도 불연 듯 슈퍼맨이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소방관이 슈퍼맨인 줄 알기 때문이다. 우리도 사람인데... 그렇게 우리는 요구조자의 안전과 동료들의 안전을 살피면서 최대한 신속하게 이송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요구조자가 춥다고 하였다. 그때 신고자인 아들이 자기 웃옷을 벗어 어머님께 덮어 드리는 거였다. 거기에다가 아버님도 옷을 벗어서 부인에게 벗어주는 거였다. 그런데도 어머님은 "나 때문에 고생하네, 미안하네."라는 말을 연거푸 아들과 대원들에게 하시는 거였다.

나도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에 저 아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고, 어머님은 저 위급한 상황에서도 아들을 생각하고 걱정한다는 것에 진한 감동을 느꼈다. 불연 듯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요구조자를 내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방관 생활을 이제 막 시작하는 입장으로서  앞으로의 귀감이 되는 상황이었다. 한편으로는 좋은 일 한다고 조상님 찾아뵙고 내려오다 사고가 난 게 불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저런 효성이 그나마 다행인 상황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6명이 환상의 호흡으로 산을 절반이상 내려왔을 때 멀리서 구조대가 보였고, 우리는 그때서야 한시름 놨다고 생각했다.

길 폭도 이전보다는 넓어져서 6명이 들어도 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1시간 10여분 가량을 이송하면서 나름대로 각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요구조자의 안전과 신속한 이송을 생각하면서도 각 동료의 안전도 살펴주는 그런 모습에 뭔지 모를 진한 느낌이 왔다.

결국 아무 사고 없이 구급차로 이송하였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난 여기서 정말 소방관이 되기를 잘했다는 것과 소방관이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송도중엔 정말 힘이 들고 했지만 다 내려와서 보호자의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가 나의 모든 피로를 싹 다 날려줬다.

참된 보람을 느꼈다.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정말 내가 사는 이유라고 할 정도로 뿌듯했다. 그동안 "남을 위해 내가 한 일이 얼마나 될까?" 하며 조금 부끄러웠는데 앞으로 남을 위해 살아가면서 하나씩 만회해 나가야겠다.

앞으로 소방관이 나의 천직이라 생각하고 내가 이 길을 가게 된 것을 정말 영광으로 생각하고 보람되게 살고 싶다.

울산 중부소방서 범서119안 전센터 주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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