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풍랑 속의 평안

풍랑 속의 평안

  • 기자명 편집부
  • 입력 2017.04.27 15:42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대 사회는, 의식주에 대한 걱정거리는 과거보다 감소했고, 과학문명과 의학의 발달로자동화, 고속화된 최첨단의 삶을 영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열악한 환경 속에 살았던 선조들보다도, 평안은커녕 불안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사야 26장 3절을 보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심지가 견고한 자'란 '마음의 뿌리가 견고한 자'라는 뜻입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결단코 마음뿌리가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신앙인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성도를 평강에서평강으로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입니다.또한 그런 성도가 평강에 평강을 체험하게 되는 이유는, 그가 "주를 의뢰"하기 때문이라고말씀하십니다. 요즘 날마다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는 정치인들을 비롯해서 세상의 모든 것이 변화무쌍하고, 사람의 마음도 수시로 바뀌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시고, 바위처럼 전혀 동요됨이 없으시기에,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가장 신뢰할 수 있는분이십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며, 영원불변하시고, 성실하신 그 하나님을, 확고한 신앙으로 붙들고 의지하는 사람이야말로 지속적으로평안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이러한 풍랑 속에서도 평안 얻는 비결을 생각해보면서 말씀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진정한 평안은 어떤 것인가?

여러분은 진정한 평안이 담긴 그림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어느 마을에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돈이 많아 여유 있고 호화스럽게생활했지만 마음속은 늘 불안하여 편치가 않았습니다. 궁리 끝에 그는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그림을 한 점 구해 거실에 걸어두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이름난 화가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후하게 대접한 뒤, 마음에 평안을 주는 그림을 그려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습니다. 그 대가로 거액을 내놓고 전시회도 열 계획이라고 하자 화가들은 각자 성의를 다해 그림에 몰두했습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드디어 작품 전시회가열렸습니다. 아름다운 산과 호수의 잔잔한 수면을 멋지게 묘사한 그림도 있었고, 한적한 시골마을의 평화로운 풍경을 한껏 담은 그림들도 여러 점 있었습니다. 부자는 여러 작품들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감상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기기도 했고, 간혹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중 어떤 그림도 그의 마음을 깊은 평안으로 이끌지는못했습니다. 그런데 전시된 그림을 따라 전시장안을 거의 다 돌았을 즈음, 그는 맨 마지막 그림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고는 한동안 그 그림을뚫어져라 쳐다보았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벼랑 한쪽 틈에 둥지를 튼 로빈새가 알을 품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바람이조금만 불어도 금방 폭포수에 휩싸여 천길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지만, 알을 품고 있는 어미 로빈새의 눈 속에는 불안이나 공포의 기미를 전혀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림을 감상하던 그는 갑자기 "바로 이거야!"라며 기쁨의 탄성을 질렀습니다. 옆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 그림을 택한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나는 비로소 이 그림 속 로빈새의 눈빛에서어떤 상황에도 동요되지 않는 마음의 참 평안을 보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평안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잔잔한 호수 같은 그런평안이 아닙니다. 폭풍우가 불지 않아서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풍랑이 일지 않아서 평안한것이 아닙니다. 언제 폭풍이 불지, 언제 풍랑이 일지 우리는 아무도 모릅니다. 물보라에 젖으면서도 주위의 어떤 환경에도 요동하지 않고 내면의 평안을 깊이 누릴 수 있는 로빈새의그 평안이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참 평안인 것입니다.

2. 풍랑은 왜 오는가?

1)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온다.

①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生死禍福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모르고,제 멋대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상 2:6∼7절에는"야훼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 도다 야훼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운명은 전적으로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 회복해야 합니다.

② 불신앙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어드리지 않으면, 그런 우리를 위해 주님은 역사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히 11:6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인생의 어떤 풍랑도 해결해주실 분이심을믿어 드려야 평안히 거할 수 있습니다.

③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약 4:17 이러므로 사람이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말씀하셨습니다. 알고 있는 말씀부터 하나씩하나씩 순종해야 평안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이웃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온다.

① 이기적인 탐심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골 3:5에서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하면서, 탐심은 곧 우상 숭배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남북으로, 동서로편을 가르고, 노사가 갈라지고 노인과 젊은이들이 등을 돌리며, 있는 자와 없는 자가 나뉘고, 배운 자와 못 배운 자가 서로 무시하고 먼저 온 자와 나중 온자가 반목하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쟁의 원인을 가만히들어보면, 하나님의 영광이나 영혼구원과는 하등에 상관이 없는 사소한 일들로 다툽니다.'사랑과 연합'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이러한불필요한 에너지소모로 편 가르기를 한다면 모두에게 비극인 것입니다.

자기의 이기적인 기준에 맞지 않거나, 이해타산이 맞지 않거나 자존심이 좀 상하거나 체면이 손상되거나 기득권에침해를 입으면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일임에도 목숨 걸고 달려들어 여지없이 할퀴고 흠집을내며 짓밟습니다. 주님을 생각함으로 참을 수없다면 그게 무슨 성도이겠습니까?주님은, 성자하나님이시면서도, 바알세불이란 귀신으로 불리셨습니다.

신성모독이라는 억울한 말을 들으셨으며, 십자가 수난 전에는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주님보다도 우리가 더 고귀한 존재입니까? 주님보다도 우리가 더 억울하게 치욕을 당했습니까? 주님 생각하며 나를 접을 수 없다면 우리는 성도로서의 그 맛을 잃은 것입니다. 공동체에 어찌되든, 내 의견을 관철시키고야 직성이 풀리는 그마음은 탐심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과 교회 앞에 우상숭배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모두함께 복 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집안이 나뉘면 그 집안이 망하고 나라가 나뉘면 그 나라가 망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② 이해와 용서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4장 2∼3절에 "모든 겸손과 온유로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찌하든지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화해하여 하나로 연합되어야 합니다.③ 상대를 탓하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의우화가 생각납니다. 『어느 날 회색 털을 가진늑대가 양을 마구 잡아먹자 농부들이 늑대를잡아 두들겨 팼다.

늑대는 소리쳤습니다."나를 이렇게 때려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어,내 털이 회색이라서 쓸 모 없는 것은 내가 알바 아니잖아. 그런데도 마구 때리다니 너무해"그러자 사람들은 더 세게 두들기며 말했습니다. "네 이놈, 우리는 네 털이 회색이니까 두들기는 것이 아니라, 네 놈이 양을 잡아먹었기 때문에 두들기는 것이란 말이다!"늑대는 자신의 죄는 전혀 돌아보지 않고, 도리어 엉뚱한남 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남을 탓합니다.우리도 이런 착각을 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풍랑 속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까?

美 교회부흥의 역사에 윌리엄 퀘일(1860∼1925)이라는, 감리교 목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고민하는 문제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침대 아래로 내려가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적막한 한밤중에 그는 자신이 베고 있었던 베개를 끌어안고 "주님, 이 고통스러운 문제를 제가 어떻게 해결해야합니까?"라며 울부짖었습니다.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가 스스로 문제를 끌어안고 괴로워하고 있구나. 그러나 그 문제는 내가해결할 일이구나. 너는 자라. 남은 밤 시간 내가 깨어 있으마" 말씀하십니다. 그 음성에 그는 감사해하면서 비로소 평안히 잠들 수가 있었고 이후 문제는 해결됐다고 그는 증거 했습니다.우리도 그 주님께로 우리도 가야 합니다.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던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은 저마다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치며 소란스러웠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베고 잠이 드셨습니다.

풍랑 속에 진정한 평안이, 배의 높은 가격이나 좋은 시설에 있습니까? 아니면 유능한 항해술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열 두 시간이 지나면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주님께서는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시며 오히려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풍랑 가운데서도!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도! 동요치 않으시는 주님의 평안이야말로, 성도인 저와 여러분이 누려야 할 진정한 참 평안인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평안하자! 평안하자!'고 구호를 외친다고해서 평안해지는 것은아닙니다. 진정한 평안은, 결코 사람이 자가발전'해서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평안은 오직위에 계신 주님께로부터 말미암는 것입니다.'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한 평강'이 성령의감동감화하심과 큰 위로로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풍랑을 뛰어넘어 반드시승리할 소망으로 풍랑을 헤치고 날아오를 말씀의 지혜로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되시기를축원합니다.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의 상황이 얼마나 센풍랑 속에 갇혔는지는 몰라도 마귀가 주는 의심과, 염려와 두려움은 다 사라지고 능력의 주님, 사랑의 주님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한 결 같이 동행하신다는 확신을 얻고서,이 여러분의 삶이되시기를 간절히축원합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결단코 마음뿌리가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신앙인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성도를 평강에서평강으로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입니다.또한 그런 성도가 평강에 평강을 체험하게 되는 이유는, 그가 "주를 의뢰"하기 때문이라고말씀하십니다. 요즘 날마다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는 정치인들을 비롯해서 세상의 모든 것이 변화무쌍하고, 사람의 마음도 수시로 바뀌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시고, 바위처럼 전혀 동요됨이 없으시기에,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가장 신뢰할 수 있는분이십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며, 영원불변하시고, 성실하신 그 하나님을, 확고한 신앙으로 붙들고 의지하는 사람이야말로 지속적으로평안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이러한 풍랑 속에서도 평안 얻는 비결을 생각해보면서 말씀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진정한 평안은 어떤 것인가?

여러분은 진정한 평안이 담긴 그림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어느 마을에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돈이 많아 여유 있고 호화스럽게생활했지만 마음속은 늘 불안하여 편치가 않았습니다. 궁리 끝에 그는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그림을 한 점 구해 거실에 걸어두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이름난 화가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후하게 대접한 뒤, 마음에 평안을 주는 그림을 그려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습니다. 그 대가로 거액을 내놓고 전시회도 열 계획이라고 하자 화가들은 각자 성의를 다해 그림에 몰두했습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드디어 작품 전시회가열렸습니다. 아름다운 산과 호수의 잔잔한 수면을 멋지게 묘사한 그림도 있었고, 한적한 시골마을의 평화로운 풍경을 한껏 담은 그림들도 여러 점 있었습니다. 부자는 여러 작품들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감상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기기도 했고, 간혹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중 어떤 그림도 그의 마음을 깊은 평안으로 이끌지는못했습니다. 그런데 전시된 그림을 따라 전시장안을 거의 다 돌았을 즈음, 그는 맨 마지막 그림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고는 한동안 그 그림을뚫어져라 쳐다보았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벼랑 한쪽 틈에 둥지를 튼 로빈새가 알을 품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바람이조금만 불어도 금방 폭포수에 휩싸여 천길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지만, 알을 품고 있는 어미 로빈새의 눈 속에는 불안이나 공포의 기미를 전혀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림을 감상하던 그는 갑자기 "바로 이거야!"라며 기쁨의 탄성을 질렀습니다. 옆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 그림을 택한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나는 비로소 이 그림 속 로빈새의 눈빛에서어떤 상황에도 동요되지 않는 마음의 참 평안을 보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평안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잔잔한 호수 같은 그런평안이 아닙니다. 폭풍우가 불지 않아서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풍랑이 일지 않아서 평안한것이 아닙니다. 언제 폭풍이 불지, 언제 풍랑이 일지 우리는 아무도 모릅니다. 물보라에 젖으면서도 주위의 어떤 환경에도 요동하지 않고 내면의 평안을 깊이 누릴 수 있는 로빈새의그 평안이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참 평안인 것입니다.

2. 풍랑은 왜 오는가?

1)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온다.

①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生死禍福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모르고,제 멋대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상 2:6∼7절에는"야훼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 도다 야훼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운명은 전적으로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 회복해야 합니다.

② 불신앙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어드리지 않으면, 그런 우리를 위해 주님은 역사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히 11:6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인생의 어떤 풍랑도 해결해주실 분이심을믿어 드려야 평안히 거할 수 있습니다.

③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약 4:17 이러므로 사람이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말씀하셨습니다. 알고 있는 말씀부터 하나씩하나씩 순종해야 평안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이웃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온다.

① 이기적인 탐심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골 3:5에서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하면서, 탐심은 곧 우상 숭배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남북으로, 동서로편을 가르고, 노사가 갈라지고 노인과 젊은이들이 등을 돌리며, 있는 자와 없는 자가 나뉘고, 배운 자와 못 배운 자가 서로 무시하고 먼저 온 자와 나중 온자가 반목하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쟁의 원인을 가만히들어보면, 하나님의 영광이나 영혼구원과는 하등에 상관이 없는 사소한 일들로 다툽니다.'사랑과 연합'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이러한불필요한 에너지소모로 편 가르기를 한다면 모두에게 비극인 것입니다.

자기의 이기적인 기준에 맞지 않거나, 이해타산이 맞지 않거나 자존심이 좀 상하거나 체면이 손상되거나 기득권에침해를 입으면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일임에도 목숨 걸고 달려들어 여지없이 할퀴고 흠집을내며 짓밟습니다. 주님을 생각함으로 참을 수없다면 그게 무슨 성도이겠습니까?주님은, 성자하나님이시면서도, 바알세불이란 귀신으로 불리셨습니다.

신성모독이라는 억울한 말을 들으셨으며, 십자가 수난 전에는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주님보다도 우리가 더 고귀한 존재입니까? 주님보다도 우리가 더 억울하게 치욕을 당했습니까? 주님 생각하며 나를 접을 수 없다면 우리는 성도로서의 그 맛을 잃은 것입니다. 공동체에 어찌되든, 내 의견을 관철시키고야 직성이 풀리는 그마음은 탐심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과 교회 앞에 우상숭배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모두함께 복 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집안이 나뉘면 그 집안이 망하고 나라가 나뉘면 그 나라가 망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② 이해와 용서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4장 2∼3절에 "모든 겸손과 온유로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찌하든지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화해하여 하나로 연합되어야 합니다.③ 상대를 탓하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의우화가 생각납니다. 『어느 날 회색 털을 가진늑대가 양을 마구 잡아먹자 농부들이 늑대를잡아 두들겨 팼다.

늑대는 소리쳤습니다."나를 이렇게 때려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어,내 털이 회색이라서 쓸 모 없는 것은 내가 알바 아니잖아. 그런데도 마구 때리다니 너무해"그러자 사람들은 더 세게 두들기며 말했습니다. "네 이놈, 우리는 네 털이 회색이니까 두들기는 것이 아니라, 네 놈이 양을 잡아먹었기 때문에 두들기는 것이란 말이다!"늑대는 자신의 죄는 전혀 돌아보지 않고, 도리어 엉뚱한남 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남을 탓합니다.우리도 이런 착각을 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풍랑 속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까?

美 교회부흥의 역사에 윌리엄 퀘일(1860∼1925)이라는, 감리교 목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고민하는 문제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침대 아래로 내려가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적막한 한밤중에 그는 자신이 베고 있었던 베개를 끌어안고 "주님, 이 고통스러운 문제를 제가 어떻게 해결해야합니까?"라며 울부짖었습니다.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가 스스로 문제를 끌어안고 괴로워하고 있구나. 그러나 그 문제는 내가해결할 일이구나. 너는 자라. 남은 밤 시간 내가 깨어 있으마" 말씀하십니다. 그 음성에 그는 감사해하면서 비로소 평안히 잠들 수가 있었고 이후 문제는 해결됐다고 그는 증거 했습니다.우리도 그 주님께로 우리도 가야 합니다.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던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은 저마다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치며 소란스러웠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베고 잠이 드셨습니다.

풍랑 속에 진정한 평안이, 배의 높은 가격이나 좋은 시설에 있습니까? 아니면 유능한 항해술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열 두 시간이 지나면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주님께서는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시며 오히려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풍랑 가운데서도!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도! 동요치 않으시는 주님의 평안이야말로, 성도인 저와 여러분이 누려야 할 진정한 참 평안인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평안하자! 평안하자!'고 구호를 외친다고해서 평안해지는 것은아닙니다. 진정한 평안은, 결코 사람이 자가발전'해서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엄기호 목사

저작권자 © 소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