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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소방인 남헌 최금성

시대를 앞서간 소방인 남헌 최금성

  • 기자명 편집부
  • 입력 2013.02.01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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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유비스 주식회사 창업자 최금성 회장은“인간은 항상 불이나 화재로부터의 위험을 안고 산다. 소방방재는 누군가는 해야하는일우리나라는 아직 이 분야가 낙후되어 있지만 나는 오로지 사명감을 갖고 이 길을 간다. 그같은 선구자의 사명을 갖고 전력을 해 옴으로 우리나라의 안전은 이만큼이나 자리를 굳혀가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살아야 할것이다”

최금성회장은 전란이 후 피폐해진 국토의 복구작업이 한창이던 때 인간생명의 소중함과 국민 생명의 존엄한 가치를 보호하기위하여 소방산업분야에 뛰어들어 분골쇄신했다. 평생동안 이 일에만 종사해 왔고(一生一業) 국민의 건강과 태평함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다(國泰民安)는 것이 한방유비스년사의 주요골격이다. 우리는 소방업적의 산 증인 한방유비스 주식회사의 창업주인 남헌 최금성 회장의 생애와 업적을 시리즈로 정리해 나간다.

<편집자주>

이 시기의 국내 상황을 살펴보면 1970년대 초반 연이어 발생한 대형 화재로 말미암아 정부는 1973년1월15일 소방조직 관련 정부조직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1976년 8월9일 소방령 기준에 관한 규칙이 부령으로 제정된 것이다. 기구면에서 볼 때 그때까지 중앙은 내무부 치안국 소방과, 지방은 각 도 경찰국 소방과 및 소방서였고, 소방공무원은 경찰공무원법의 적용을 받아왔다.

그러나 1975년 8월 내무부 민방위본부가 설치되면서 소방과가 소방국으로 격상되었다. 서울, 부산은 자치소방체제의 소방본부로 발족되고, 소방공무원은 1977년12월 제정된 소방공무원법의 적용에 따라서 경찰로부터 독립될 수 있었다.

1970년 3월 한국방재건설(주)에서 1972년 3월 한국소방건설(주)로 사명을 바꾼 최금성 회장은 이듬해 2월 한국소방기구공업협동조합 이사장에 취임했으며, 3월에는 서울특별시 시정 자문위원(소방분야)에 임명됐다. 그러나 1970년에서 72년까지는 잦은 사명 변경에서도 알 수 있듯이 회사가 부도나는 등 창사 이래 가장 어려운 시기이기도 했다.

2대에 걸친 한.일 교류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한국 소방업계도 일본 소방업계와 공식적인 교류를 시작했다. 한국의 소방기구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을 지낸 최금성 회장과 일본 소방업계를 대표하는 가끼사와 시게치 사장의 만남은 이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는데, 두 사람은 성장 과정, 살아온 환경, 성격등이 너무 유사하여 서로 놀랄 정도라고 했으며, 공식 업무를 떠나 인간적으로도 아주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양국 업계 회의 때 한 일본 업체 사장이 “한국에 최금성 회장이 있다면 우리 일본에는 가끼사와 시게이치 사장이 있다”고 할 정도로 가끼사와 사장은 사람을 좋아하는 호탕한 성격에 후배들을 사랑하고, 멀리 내다보는 안목의 소유자로 주위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가끼사와 시게이치 사장은 일본에서 최초로 분말소화기를 개발 생산한 일본 최대의 소방 종합 메이커인 드라이케이칼주식회사(아사히 가라쓰)계열 회사에서 현재 타이코 계열사가 됨)의 창업 핵심 멤버이자 상무이사를 역임했고, 일본 최초의 소방시설. 점검 회사인(株)防災써비스센터를 창업하는 등, 당시 일본 소방업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부였다.

여기에 더하여 가끼사와 사장은 그 당시 열악했던 환경 속에서 일본의 선진 기술과 정보를 얻으려는 한국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으며, “소방에는 국경이 없다”며 많은 도움을 준 친한파 인사이기도 했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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